시녀들
| 시녀들 | |
|---|---|
| Las Meninas | |
| 영어제목 | The Maids of Honour |
| 작가 | 디에고 벨라스케스 |
| 연도 | |
| 매체 | 캔버스에 유채 |
| 사조 | 바로크 |
| 장르 | 단체 초상[*] |
| 크기 | 318 x 276 cm |
| 위치 |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왕궁 |
| 소장처 | 페르난도 7세 |
《시녀들》(스페인어: Las Meninas, 영어: The Maids of Honour)은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스페인 예술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거장이자 스페인 및 포르투갈의 왕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였던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1656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복잡하고 수수께끼 같은 화풍은 어느 것이 실재하는 것이고 어느 것이 환상인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키며, 보는 사람과 보여지는 사물 사이의 관계를 불확실하게 만든다. 이러한 복잡함으로 인해, 이 작품은 가장 많이 연구된 서양화 작품들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미술사학자 F. J. 산체스 칸톤에 따르면, 이 작품은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마드리드 궁전에 있는 큰 방을 그린 것이며, 스페인 왕실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들을 마치 스냅샷 사진을 찍은 것처럼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고 믿는다.[a][2] 몇몇 인물들은 캔버스 밖을 바라보고 있는 반면, 다른 몇몇 인물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동작을 진행하고 있다. 당시 5살의 마르가리타 왕녀를 담당하는 시녀들, 샤프롱, 호위병, 그리고 두 명의 난쟁이 궁정 광대와 개 한마리가 에워싸고 있다.
그들 바로 뒤에, 벨라스케스 자신이 큰 캔버스에 작업 중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벨라스케스는 작품 내부의 공간을 넘어 이 그림을 감상하는 감상자의 자리를 바라보고 있다.[3] 배경에는 거울이 걸려 있으며, 거울 속에는 왕과 왕비의 상반신이 보인다. 이 왕과 왕비는 감상자와 마찬가지로 "작품 내부가 아닌 바깥 공간에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몇몇 학자들은 이 왕과 왕비의 모습이 "벨라스케스가 캔버스에 작업 중인 그림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들 중의 하나로 손꼽혀 왔다. 바로크 시대의 화가 루카 지오다노는 이 작품을 가리켜 '회화의 신학'이라고 표현했으며,[4] 1827년 왕립예술원의 회장인 토머스 로렌스 경은 후임자 데이비드 윌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작품을 "예술의 진정한 철학"이라고 묘사했다.[5] 최근에는 "회화로서 무엇을 나타낼 수 있는가를 자신감있고 치밀하게 표현한 벨라스케스의 걸작이며, 이젤을 사용한 회화 방식이 가진 가능성을 가장 철저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평가 받았다.[6]
배경
[편집]펠리페 4세 왕실
[편집]
17세기 스페인에서 화가들이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화가는 시인이나 음악가와 같은 예술가가 아닌 기술자 취급을 받았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라스케스는 펠리페 4세 왕실을 통하여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개척해 나갔으며, 결국 1651년 2월 왕궁에서 궁정 시종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자리는 그에게 많은 물질적, 사회적 혜택을 주었지만, 동시에 많은 의무를 지웠다. 사망하기까지 8년 동안 그가 완성한 작품은 그다지 많지 않으며, 작품들 중 대부분은 왕실 구성원들의 초상화이다.[9] 그가 시녀들을 그렸을 때, 그는 33년 동안 왕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펠리페 4세의 첫 부인인 부르봉 가의 이사벨 왕비는 1644년에 사망하였으며, 그들 사이에 난 외동아들인 발타사르 카를로스 역시 2년 뒤에 사망하였다. 대를 이을 후계자가 없게 되자 펠리페 4세는 1649년 마리아나 왕비와 두 번째로 결혼하였으며,[b] 마르가리타 왕녀는 그들의 첫 아이이자 그림이 완성될 당시의 유일한 자녀이다. 마르가리타 왕녀 이후로 어릴 때 세상을 떠난 펠리페 프로스페로 왕자(5살 때 사망)와 카를로스 왕자가 있었으며, 카를로스 왕자가 4살 때 왕위를 물려받아 카를로스 2세(1661~1700)로 등극하였다. 벨라스케스는 마리아나 왕비와 아이들의 초상화를 그렸으며,[9] 펠리페 4세 자신은 만년에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거부하였으나 이 작품에는 자신이 등장할 수 있도록 특별히 허락하였다.
1650년대 초반 펠리페 4세는 벨라스케스에게 죽은 발타사르 카를로스가 살았던 방을 하사하여 이를 궁정 박물관으로 조성하게 함으로써 그의 작업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시녀들》은 바로 이곳을 배경으로 한다. 펠리페 4세는 이 곳에 전용 의자를 마련해 놓고 벨라스케스가 작업하는 모습을 종종 지켜보곤 했다. 엄격한 궁내 예절로 인해 다소 제한적이긴 했지만, 예술을 사랑했던 이 왕은 벨라스케스와 평범하지 않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벨라스케스의 죽음 이후, 펠리페 4세는 왕위 후계자 선택을 위해 작성한 비망록에 "난 희망을 잃었다"라는 내용을 남겼다.[11][12]
1640년대와 1650년대 사이에, 벨라스케스는 궁정 화가 겸 펠리페 4세의 수많은 서양화 컬렉션을 담당하는 학예사 역할을 맡았다. 그는 업무에 있어 상당한 자유를 보장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거울, 조각상, 융단 등을 사용하여 가장 값비싼 그림들이 자리한 전시관들의 내부 장식을 관리하였다. 또한 펠리페 4세가 소유한 많은 작품들의 감정 및 관리 업무 역시 그의 일이었다. 1650년대 초, 벨라스케스는 미술 분야의 권위자로서 모든 스페인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현재 프라도 미술관에 있는 작품들 중 티치아노, 라파엘로, 루벤스 등의 작품을 포함한 많은 작품들은 벨라스케스가 직접 수집, 정리한 것이다.
보관 및 보존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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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최초 작품명은 '가족(La Familia)'이었다.[13] 시녀들은 1666년 가르시아 데 메드라노의 목록에 설명되어 있다.[14] 작품 속 인물들이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된 이 작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스페인 황금시대의 바사리'라고 불리는 안토니오 팔로미노가 1724년에 완성한 스페인 화가들의 일생을 기록한 작품집에 수록되어 있다.[3][15]
적외선 관찰 결과 자잘한 펜티멘티(작가가 작품을 수정한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예를 들어, 작품 속 벨라스케스의 머리는 원래 왼쪽이 아닌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16]
이 작품은 왼쪽과 양쪽 모두가 잘려나갔다.[c] 알카사르를 파괴한 1734년 화재로 인해 이 작품 역시 피해를 입었으며, 이후 왕실 소속 화가인 후안 가르시아 데 미란다(1677–1749)가 복원하였다. 마르가리타 왕녀의 왼쪽 볼 부분은 안료가 크게 소실되어 완전히 새로 채색하였다.[d] 화재에서 구조된 이후 이 작품은 1747년부터 48년까지 왕실 소유로 목록이 기록되었는데, 이때 그림 속의 마르가리타 왕녀가 이복 자매인 마리아 테레사로 잘못 기록되었으며 이러한 실수는 1772년 새 마드리드 왕궁에서 이 작품을 접수한 후에도 반복되었다.[19] 1794년에 작성된 왕실 소유 작품 목록에서 이 작품의 이름은 '펠리페 4세 가족' 이었으며, 1814년에 작성된 목록에도 동일한 제목으로 기재되었다. 1819년 이 작품은 프라도 미술관으로 옮겨졌으며,[d] 1843년에 제작된 프라도 미술관 카탈로그에서 처음으로 《시녀들》이라는 제목으로 등재되었다.[19]
최근 이 작품은 질감과 색상의 손실로 고통을 겪고 있다. 오염과 관중들에 노출됨으로 인해 시녀들이 입은 옷이 만들어내었던 흰색과 파란색의 선명한 대비가 바래었다.[d] 1984년 미국 미술품 복원 전문가 존 브릴리의 감독 아래 19세기에 실시된 복원작업 이후 쌓인 황색 먼지층을 제거하기 위한 마지막 작품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 미술사학자 페데리코 제리의 말에 따르면 이 작업은 "그림이 손상되어서가 아니라, 달라 보였기 때문에 맹렬한 항의를 불러일으켰다"[20][21] 또한, "[스페인 언론은] 브릴리를 비판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스페인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만이 그러한 상징적인 문화 작품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다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느 날, 브릴리가 작업하는 방 밖에서 작은 소요가 발생했다."[22] 그러나 벨라스케스 전문가인 호세 로페스-레이의 의견으로는 "복원은 완벽했다".[19] 크기, 중요성, 가치 때문에 이 그림은 전시회를 목적으로 한 외부 대여를 금하고 있다.[e]
회화 재료
[편집]1981년경 프라도 미술관에서 안료 분석을 포함한 철저한 기술 조사가 수행되었다.[24] 분석 결과 벨라스케스가 다른 그림들에서 자주 사용했던 바로크 시대의 일반적인 안료들이 사용되었음이 밝혀졌다. 이 그림에 사용된 주요 안료는 납백, 남동석 (무릎 꿇은 시녀의 치마), 주색과 붉은 레이크, 황토색과 카본 블랙이었다.[25]
회화 양식
[편집]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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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펠리페 4세의 마드리드 알카자르 궁전 내부에 위치한 벨라스케스의 작업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26] 이 천정이 높은 방은 실비오 가끼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하나의 소실점으로 구도를 잡을 수 있는 간단한 박스형 공간"이다.[27] 전경 중앙에는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1)가 서 있다. 당시 5세 였던 공주는 나중에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와 결혼했으며, 이 시점에서는 펠리페와 마리아나의 유일한 생존 자녀였다.[f] 그녀는 두 명의 시녀에게 시중을 받고 있다. 도냐 이사벨 데 벨라스코(2)는 공주에게 절을 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고, 도냐 마리아 아구스티나 사르미엔토 데 소토마요르(3)는 마르가리타 테레사 앞에 무릎을 꿇고 황금 쟁반 위에 놓인 빨간 잔 또는 부카로를 건넨다.[28] 공주 오른쪽에는 두 명의 난쟁이가 있다. 연골무형성 오스트리아인 마리 바르볼라 (4)[28]와 이탈리아인 니콜라스 페르투사토 (5)는 발로 잠자는 마스티프를 장난스럽게 깨우려 한다. 이 개는 1604년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가 펠리페 3세에게 선물한 라임 홀의 두 마스티프의 후손으로 추정된다.[g] 공주의 샤프롱인 도냐 마르셀라 데 울로아(6)은 그들 뒤에 애도복을 입고 서서 경호원 디에고 루이스 아스코나(7)와 이야기하고 있다.[28]

뒤편 오른쪽에는 1650년대 왕비의 시종관이자 왕실 태피스트리 공장장이었던 돈 호세 니에토 벨라스케스 (8)가 서 있는데, 그는 화가와 친척 관계였을 수도 있다. 니에토는 잠시 멈춰 서서 오른쪽 무릎을 굽히고 발을 다른 계단에 올려놓은 모습이다. 미술 평론가 해리엇 스톤은 그가 "오고 있는지 가고 있는지"는 불확실하다고 지적한다.[30] 그는 실루엣으로 처리되었으며, 짧은 계단 위에 있는 커튼을 잡아 열어둔 것처럼 보이고, 그 뒤에는 불분명한 벽이나 공간이 있다. 이 역광과 뒤편의 공간은, 미술사학자 애널리사 레파넨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시선을 깊숙한 곳으로 피할 수 없이 유혹한다".[31] 이에 반해 국왕 부부의 반사는 반대 방향으로, 그림 공간 앞으로 밀어낸다.
원근법의 소실점은 출입구에 있다.[h] 니에토는 왕과 왕비에게만 보이며, 왕과 왕비는 관람자의 시점을 공유한다. 조엘 스나이더는 그의 논문 각주에서 니에토가 왕비의 시종이었으며, 왕비를 위해 문을 열고 대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맥락에서 국왕 부부는 벨라스케스를 위해 취하고 있던 포즈를 끝내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래서 공주의 오른쪽에 있는 시녀(2)가 절을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32]
벨라스케스 (9)는 장면의 왼쪽에 그려져 있으며, 큰 이젤에 지지된 캔버스 너머를 응시하고 있다.[33] 그의 가슴에는 산티아고 기사단의 붉은 십자가가 있는데, 이 십자가는 그림이 완성된 지 3년 후인 1659년에야 받았다. 팔로미노에 따르면, 펠리페는 벨라스케스 사후에 이것을 추가하도록 명령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폐하 자신이 그것을 그렸다고 말한다".[34] 화가의 벨트에는 그의 궁정 관직을 상징하는 열쇠가 매달려 있다.
뒷벽의 거울에는 다른 그림들에서 식별되고, 또한 팔로미노가 확인한 펠리페 4세 (10)와 마리아나 왕비 (11)의 상반신이 보인다. 가장 일반적인 가정은 벨라스케스가 국왕 부부를 그리는 동안 포즈를 취하는 모습이 거울에 비추고 있다는 것으로, 따라서 벨라스케스가 그리는 그림에는 거울에 비치는 장면이 묘사된다는 것이다.[35]

묘사된 아홉 인물 중 다섯은 국왕 부부 또는 관람자를 직접 바라보고 있다. 그들의 시선과 왕과 왕비의 반영은 그림 공간 밖에 국왕 부부가 존재함을 확인시켜 준다.[30] 반면, 안토니오 팔로미노를 따르는 미술사학자 H. W. 잰슨과 조엘 스나이더는 왕과 왕비의 이미지가 벨라스케스의 캔버스에서 반사된 것이라고 주장한다.[36][37] 다른 작가들은 벨라스케스가 작업하는 캔버스가 그의 초상화치고는 비정상적으로 크며, 《시녀들》과 거의 같은 크기라고 언급한다. 이 그림은 예술가가 그린 국왕 부부의 그림 중, 유일하게 알려진 이중 초상화를 담고 있다.[38]
그림의 시점은 대략 국왕 부부의 시점과 일치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광범위하게 논쟁이 있다. 많은 비평가들은 왕과 왕비가 이중 초상화를 위해 포즈를 취하는 동안 공주와 그녀의 동반자들이 국왕 부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참석했다고 추정한다.[39]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이 그림이 국왕부부의 아이디어였을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
아마도 공주는 초상화 그리는 지루함을 덜어주기 위해 모셨을 것이고, 왕이나 왕비는 벨라스케스에게 공주와 시녀들의 모습이 붓으로 그릴 만한 가치 있는 주제라고 말했을 것이다. 군주가 하는 말은 항상 명령으로 취급되므로, 스쳐가는 소원 덕분에 우리가 이 걸작을 얻었을지도 모른다.[40]
그러나 어떤 이론도 보편적인 합의를 얻지 못했다.[41] 레오 스타인버그는 왕과 왕비가 관람자의 왼쪽에 있으며 거울 속 반사는 캔버스, 즉 왕과 왕비의 초상화라고 제안한다.[42] 케네스 클라크는 이 작품이 시녀들이 마르가리타 공주로 하여금 국왕 부부와 함께 포즈를 취하도록 설득하는 장면이라고 주장한다. 1960년 클라크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의 첫 느낌은 그곳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왕과 왕비의 바로 오른쪽에 서서, 델 마소가 루벤스의 작품을 모방한 그림들로 장식된 알카사르의 엄숙한 방을 내려다보며 그림 속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마르가리타 공주는 포즈를 취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제 다섯 살이 된 그녀는 많이 지친 상태다. 하지만 그녀는 바닥에 세워야 할 정도로 거대한 그림에 부모님과 함께 등장할 예정이다. 따라서 공주를 어떻게든 설득해야 한다. 시녀들은... 그녀를 달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그녀를 즐겁게 하기 위해 난쟁이 마리바르볼라와 니콜라시토를 데려왔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우리를 놀라게 하는 만큼 공주를 놀라게 하고 있다.[43]
방의 뒷벽은 그림자로 가려져 있는데 여러가지 그림이 걸려 있다. 그중에는 루벤스가 그린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 일련의 장면 중 하나와, 벨라스케스의 사위이자 수석 조수였던 델 마소가 야코프 요르단스의 작품을 모방한 그림들이 걸려 있다.[26] 그림들은 이 시기에 작성된 목록에 기록된 정확한 위치에 걸려 있다.[33] 오른쪽 벽에는 여덟 개의 작은 그림이 격자 형태로 걸려 있는데, 관람자로부터의 각도 때문에 거의 액자만 보인다.[30] 목록에 의한다면, 이 그림들은 루벤스의 오비디우스 시리즈 그림 중 델 마소의 모작으로 보이는데, 두 점만 확실히 식별된다.[26] 이 그림들은 미네르바가 아라크네를 벌하는 모습과 아폴론이 마르시아스를 이기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이야기 모두 지혜의 여신이자 예술의 수호신인 미네르바와 관련이 있다. 이 두 전설은 모두 필멸자가 신에게 도전하고 끔찍한 결과를 맞이하는 이야기이다. 한 학자는 미네르바와 아라크네라는 두 여성에 관한 전설은 왕비와 같은 쪽에 있고, 신 아폴론과 사티로스 마르시아스를 포함하는 남성 전설은 왕과 같은 쪽에 있다고 지적한다.[44]
구도
[편집]그려진 표면은 수평으로 4등분, 수직으로 7등분되어 있고, 이 격자가 정교한 인물 그룹을 구성하는 데 사용되었는데, 이는 당시 흔한 기법이었다.[45] 벨라스케스는 9명의 인물—왕과 왕비의 반영된 이미지를 포함하면 11명—을 그렸지만, 이들은 캔버스의 아래쪽 절반만을 차지한다.[46]
로페스-레이에 따르면, 이 그림에는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자화상, 그리고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 왕비의 상반신 반영 이미지 등 세 가지 초점이 존재한다. 1960년, 클라크는 이 그림의 성공이 무엇보다도 빛과 그림자의 정확한 처리 결과라고 주장했다.
각 초점은 우리를 새로운 관계로 끌어들인다. 《시녀들》처럼 복잡한 그룹을 그리려면 화가는 전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일관된 척도를 머릿속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는 이를 돕기 위해 모든 종류의 장치를 사용할 수 있으며, 원근법도 그중 하나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완전한 시각적 인상에 대한 진실은 한 가지, 즉 색조의 진실에 달려 있다. 드로잉은 간략할 수 있고, 색상은 칙칙할 수 있지만, 색조의 관계가 진실하다면 그림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45]
그러나 초점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다. 레오 스타인버그에 따르면 그림에서 직교하는 선들은 초점 중심을 이동시키도록 의도적으로 위장되어 있다. 로페스-레이와 유사하게, 그는 세 가지 초점을 설명한다. 그러나 문에 서 있는 남자가 소실점이다. 더 구체적으로, 그의 팔꿈치 굽은 곳이 창문의 직교선과 천장 조명이 만나는 지점이다.[47]
깊이와 차원은 선형 원근법, 형태의 겹침, 그리고 특히 클라크가 언급했듯이 색조의 사용을 통해 표현된다. 이러한 요소는 그림 내에서 여러 방식으로 작동한다. 첫째, 그려진 방 안팎에 자연광이 나타난다. 중경과 전경의 그림 공간은 두 가지 광원, 즉, 열린 문에서 들어오는 가는 빛줄기와 오른쪽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넓은 빛줄기에 의해 비춰진다.[33] 20세기 프랑스 철학자이자 문화 비평가인 미셸 푸코는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이 작업실 전경과 그 앞에 있는 (그림에는 표현 안된) 왕과 왕비, 그리고 관람자가 위치한 영역을 모두 비춘다고 관찰했다.[48]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빛이 장면을 세 부분으로 명확하게 나누고 있다고 주장한다. 전경과 배경 평면은 강하게 조명되고, 그 사이에 어두워진 중간 공간에는 실루엣 처리된 인물들이 있다.[49]
벨라스케스는 이 빛을 각각의 형태에 양감과 선명도를 더할 뿐만 아니라 그림의 초점을 정의하는데도 사용하였다. 빛이 오른쪽에서 흘러 들어오면서 광원에 가장 가까이 있는 남성 난쟁이의 갈색 머리에 밝게 반짝인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그림자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색조가 특별한 관심을 끌지 못한다. 비슷하게, 인사하고 있는 시녀의 뺨에도 빛이 비스듬히 비치지만, 그녀의 얼굴 이목구비는 비치지 않는다. 그녀의 밝은 색 드레스 대부분은 그림자에 의해 어두워져 있다. 그러나 공주는 완전한 조명 아래 서 있으며, 얼굴은 밝은 광원을 향하고 있다. 그녀의 얼굴은 옅은 거미줄 같은 머리카락으로 둘러싸여 있어 그림 속 다른 모든 것과 차별화된다. 빛은 그녀의 체형을 볼륨감 있게 모델링하여, 코르셋과 뻣뻣한 보디스에 단단히 묶인 작은 몸통의 원추형 특성과, 타원형 사탕 상자처럼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페티코트 치마를 드러낸다. 이 치마는 밝은 브로케이드와의 날카로운 대비를 통해 깊은 그림자를 드리워 작은 인물을 주요 관심 지점으로서 강조한다.[50]

벨라스케스는 공주의 시녀들을 서로 마주 보고, 앞뒤로 배치하여 위치와 조명을 조절함으로써 공주를 더욱 강조한다. 관람자의 왼쪽에 있는 시녀는 밝은 조명을 받아 옆모습이 빛나며, 그녀의 소매는 대각선을 이룬다. 그 반대편 인물은 조명이 더 넓지만 덜 반사됨으로써, 두 시녀 사이에 대각선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그들의 주인이 보호받고 서 있음을 보여준다.[i]
공주가 차지하는 공간을 가로지르는 또 다른 내부 대각선이 있다. 두 시녀의 손이 이루는 직선이 공주의 가슴을 통과한다. 여성 소인증 환자와 벨라스케스 자신 사이에도 유사한 연결이 있는데, 둘 다 비슷한 각도에서 관람자를 바라보며 시각적 긴장감을 조성한다. 벨라스케스의 얼굴은 직접적인 빛이 아닌 반사된 빛에 의해 희미하게 비춰진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특징은 소인증 환자의 특징만큼 뚜렷하지는 않지만, 광원에 훨씬 더 가까이 있는 소인증 환자보다 더 뚜렸하게 보인다. 관람객에게 완전히 드러나는 화가의 모습은 시선을 사로잡으며, 대조적인 검은 머리카락, 손과 붓에 비치는 빛, 그리고 예술가의 소매에 정교하게 배치된 삼각형의 빛으로 중요성을 강조한다. 삼각형은 얼굴을 직접 가리키고 있다.[51]
거울은 넓은 검은색 직사각형 안에 완벽하게 정의된 깨지지 않은 직사각형이다. 밝게 빛나는 얼굴처럼 명확한 기하학적 형태는, 기하학적으로 깨진 형태의 문, 또는 전경의 소인증 환자나 배경의 남자와 같이 그림자 진 얼굴이나 비스듬한 얼굴보다 관람자의 주의를 더 끈다. 관람자는 왕과 왕비의 특징을 구별할 수 없지만, 거울 표면의 오팔 빛 광택 속에서 빛나는 얼굴은 관람자를 향해 분명히 돌려져 있다. 조너선 밀러는 "거울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주변 벽의 어둠과 대비되는, 일관성이 없는 밝기를 가진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인데, 이는 강하게 조명된 왕과 왕비의 모습에서 반사되어 빌려온 것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52]
시녀들이 서로에게 비치듯, 공주을 섬기고 돌보는 샤프롱과 경비원처럼, 왕과 사는 남자 왕과 오아비도 희미하게 비춰진 형태로 자신들의 이중체를 형성한다. 이 인물들의 배치는 남자 한 명, 부부, 남자 한 명, 부부의 패턴을 설정하며, 바깥쪽 인물들은 다른 인물들보다 관람자에게 더 가깝지만, 모두 그림 표면의 같은 수평선을 차지한다.[51]
그림의 내부 복잡성을 더하는 것은 전경의 남성 소인증 환자로, 그가 들어 올린 손은 배경의 문앞에 있는 인물의 제스처를 반영하고, 그의 장난기 있는 태도와 중심 적인 행동은 그와 완전히 대조된다. 그의 자유로운 자세, 그림자 진 옆모습, 그리고 갈색 머리카락은 모두 그를 공주 왼쪽의 무릎 꿇은 시종과 거울상처럼 보인다. 그러나 화가는 그를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빛보다 앞에 배치하여, 이 전경 인물의 색조 대비를 최소화했다.[51]
공간적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화가가 가장 철저하게 표현한 건축 공간이며, 천장이 보이는 유일한 작품이다. 로페스-레이에 따르면, 벨라스케스는 다른 어떤 구도에서도 이 작품처럼 관람자의 시선을 시야 너머로 극적으로 이끌지 않았다. 그가 그리고 있는 캔버스와 왕과 왕비가 서 있는 액자 너머의 공간은 오직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50] 텅비고 어두운 천장, 벨라스케스 캔버스의 뒷면, 그리고 이 그림의 엄격한 기하학적 구조는 활기차고 찬란하게 빛나며 호화롭게 그려진 전경의 주변 풍경과 대조를 이룬다.[51] 스톤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그림 속 모든 인물을 한눈에 담을 수 없다. 그림의 실제 크기와 비율 때문에 한 눈에 감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물들의 머리가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분산된다. 그림은 이미지를 통해 소통하며, 이해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전개되는 역사의 맥락에서 차례로, 하나씩 살펴봐여 한다. 이 그림은 프레임(액자) 속 프레임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여전히 프레임(틀)에 박히지 않은 역사이다.[53]
카르에 따르면, 이 구성은 프란스 프랑켄 2세, 빌렘 반 하흐트, 또는 다비트 테니에르 2세와 같은 전통적인 네덜란드 화가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테니에르의 작품은 펠리페 4세가 소유하고 있었고 벨라스케스도 보았을 것이다. 그들의 그림은 《시녀들》처럼, 종종 중요한 수집가나 통치자의 공식 방문을 묘사하는데, 이는 흔한 일이었고, "일련의 창문이 한쪽 벽을 지배하는 방, 그리고 창문 사이와 한쪽 벽에 그림들이 걸려 있는 방을 보여준다." 갤러리 초상화는 왕족이나 상류층뿐만 아니라 예술가를 찬양하기 위해서도 사용되었는데, 이는 이 작품에 대한 벨라스케스의 의도였을 수도 있다.[54]
거울과 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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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에 비친 그림의 공간적 구조와 배치는,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가 관람객 쪽에서 공주와 그녀의 일행을 마주 보고 서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잰슨에 따르면, 전경의 인물 집합은 펠리페와 마리아나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화가가 초상화를 그리는 것처럼 보이므로, 화가의 시선도 그 부부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36] 비록 거울 반사로만 볼 수 있지만, 그들이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사회적으로도 구도상으로도 캔버스 중앙을 차지한다. 관람자와 그림과의 관계는 불확실하다. 국왕 부부가 관람자 옆에 서 있는지, 아니면 관람자를 대신하여 그들의 눈을 통해 장면을 보고 있는지에 대해 논쟁이 있었다. 다만, 벨라스케스, 공주, 마리바르볼라 세 인물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이들은 관람자를 직접 바라보는 것처럼 보인다.[55]
뒷벽의 거울은 존재하지 않는 왕과 왕비를 나타내 준다. 해리엇 스톤의 말에 따르면, "그림 앞에서 왕과 왕비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세대를 넘은 관람자들"이다.[30] 1980년에 비평가 스나이더와 콘은 다음과 같이 관찰했다:
벨라스케스는 거울이 그 이미지를 위해 유용한 [sic] 그려진 캔버스에 의존하기를 원했다. 왜 그는 그것을 원했을까? 거울 속의 빛나는 이미지는 왕과 왕비를 직접 반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상으로 작용한다. 거울은 자연을 능가한다. 거울 이미지는 단지 반사일 뿐이다. 무엇의 반사인가? 실제 사물의 반사—벨라스케스의 예술의 반사이다. 신성하게 임명된 군주들 앞에서... 벨라스케스는 자신의 예술성에 빠져 펠리페와 마리아에게 거울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그들의 대화가의 통찰력 있는 시각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으라고 조언한다. 벨라스케스의 존재 앞에서 거울 이미지는 실제의 서툰 모방일 뿐이다.[56]

《시녀들》에서 왕과 왕비는 그림 "밖"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뒷벽 거울에 비친 모습은 그들을 그림 공간 "안"에 끌어들인다.[57] 스나이더는 이 그림이 "위엄의 거울" 또는 왕자의 거울에 대한 암시라고 제안한다. 스나이더는 거울이 왕과 왕비의 문자적인 반영이면서도, "모범적인 군주의 이미지, 이상적인 인물의 반영"이라고 주장하였다.[58] 나중에 그는 공주에게 초점을 맞춰, 벨라스케스의 초상화가 "공주 교육을 위한 매뉴얼과 같은 그림—공주의 거울"이라고 썼다.[59]
이 그림은 1434년 얀 판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판 에이크의 그림은 펠리페의 궁전에 걸려 있었고, 벨라스케스에게 익숙했을 것이다.[16][60]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에도 그림 공간 뒤쪽에 거울이 놓여 있어, 벨라스케스 그림의 관람자와 같은 각도로 부부와 두 인물을 반사한다. 두 인물은 너무 작아서 식별할 수 없지만, 한 명은 예술가 자신을 의도했을 수 있다고 추측된다. 다만, 그림을 그리는 행위로는 묘사되지 않는다. 뤼시앵 달렌바흐에 따르면:
《시녀들》의 거울은 반 에이크의 그림처럼 관찰자를 향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부부가 나타나는 "후방" 거울이 볼록하지 않고 평평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과정이 더 사실적이다. 플랑드르 그림의 반사가 거울의 곡선에 의해 압축되고 변형된 공간 내에서 사물과 인물을 재구성하는 반면, 벨라스케스의 거울은 원근법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그것은 그림 앞에 위치한 왕과 왕비의 완벽한 분신을 캔버스에 투영한다.[35]
해석
[편집]도슨 카(Dawson Carr)에 따르면 《시녀들》의 모호함은 "예술과 삶이 환상임을 암시한다".[61] 환상과 현실의 관계는 17세기 스페인 문화의 핵심 관심사였으며, 스페인 바로크 문학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인 《돈키호테》에서 크게 다루어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의 희곡 《인생은 꿈》은 벨라스케스의 그림과 문학적으로 동등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광기. 인생이란 무엇인가?
그림자, 환상, 그리고 허상.
가장 큰 선행도 작다. 모든 인생은,
단지 꿈일 뿐이며, 꿈조차도 꿈이다.[61]

존 맨칩 화이트는 이 그림이 벨라스케스의 삶과 경력 전체, 그리고 그 시점까지의 그의 예술을 요약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왕실 궁전의 한 방에 자신의 유일하게 확인된 자화상을 그렸는데, 그 방은 왕족, 궁정인, 그리고 궁정에서의 그의 삶을 나타내는 귀중한 물건들로 둘러싸여 있었다.[28] 미술사학자 스베틀라나 알페르스는 벨라스케스가 왕족과 귀족들과 함께 작업하는 예술가를 묘사함으로써 예술가와 그의 예술 모두에게 높은 지위를 주장했으며,[63] 특히 회화가 기계적인 예술이 아니라 자유과임을 제안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구분은 당시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벨라스케스에게는 산티아고 기사단 규칙이 기계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배제했기 때문에 중요했을 것이다.[6] 카르는 이것이 벨라스케스가 자신이 "장인이나 상인이 아니라 궁정 관리"임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이것은 왕실 가족에게 받아들여질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는 방법이었다.[64]
미셸 푸코는 《말과 사물》(1966)의 첫 장을 《시녀들》 분석에 할애했다. 푸코는 이 그림을 세부적으로 묘사하지만, "미술사 연구의 다양한 텍스트에 의해 규정되거나 걸러지지 않은 언어"로 설명한다.[65] 푸코는 그림을 주제, 예술가의 전기, 기술적 능력, 출처와 영향, 사회적 맥락, 후원자와의 관계 등을 고려하지 않고 이 그림을 바라보았다. 대신 그는 화가, 피사체-모델, 관람자 사이의 복잡한 시각적 관계망을 강조하며 그림의 의식적인 기교를 분석하였다.
이 그림은 화가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다. 단지 대면, 시선이 서로의 시선을 포착하고, 직접적인 시선이 교차하며 서로를 겹치는 것 뿐이다. 그러나 이 가느다란 상호 가시성은 불확실성, 교환, 그리고 속임수의 복잡한 네트워크를 포괄한다. 화가는 우리가 그의 모델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는 한에서만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66][67]
푸코에게 《시녀들》은 새로운 에피스테메, 즉 사고방식의 첫 징후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그가 유럽 사상에서 "두 가지 위대한 불연속성"이라고 보는 고전과 현대 사이의 중간 지점을 나타낸다. "아마도 벨라스케스의 이 그림 속에는 고전주의적 표상의 재현, 그리고 우리에게 열어주는 공간의 정의가 존재할 것이다... 마침내 그것을 가로막던 관계로부터 해방된 재현은 순수한 형태의 재현으로 자신을 내어줄 수 있다."[66][68]
이제 그(화가)는 중립적인 진동 중심에서 움직이지 않는 순간에 포착된다. 그의 어두운 몸통과 밝은 얼굴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중간에 있다, 즉, 우리의 시야 밖에 있는 캔버스에서 나타나서 우리의 시선 속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그가 잠시 후 오른쪽으로 한 발짝 움직여 우리의 시선에서 벗어나면, 그는 자신이 그리는 캔버스 바로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는 잠시 동안 방치되었던 그의 그림이 다시금 그에게 그림자와 침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그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마치 화가가 그림 속에 재현되어 있는 동시에, 자신이 무엇인가를 재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69]
자비에르 데루빌(Xavier d'Hérouville)은 2015년 분석에서 이 그림을 "펠리페 4세의 가족"이라는 원래 이름에 더 가깝게 접근시켰다. 이 이름은 당시 벨라스케스와 동시대 화가인 루카 조르다노가 "회화의 신학"이라고 부르게 된 계기가 되었다.[46] 이 표현을 통해 화가는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신적인 관점을 개념화했을 것이다. 관람객이 왕의 서재를 위해 제작되었던 이 그림 앞에 서면, 그는 즉시 신성한 힘, 즉 펠리페 4세의 가족에 "보이지 않으면서 볼 수 있는" 힘을 부여받는다. 따라서 이 캔버스는 "단방향 거울"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 거울 앞에서 공주와 시종들은 자신을 바라보고, 군주와 아내는 거울 뒤에서 신성한 힘을 부여받고, 여유롭고 완전한 재량으로 자신의 평생의 작품인 "가족"을 가장 넓은 의미로 숙고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캔버스는 그림이 그려질 당시 벨라스케스의 예술의 상태를 요약한 것일 뿐만 아니라, 벨라스케스의 삶과 경력에 대한 이력서로도 볼 수 있다.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궁정 내 자신의 존재의 세 가지 핵심 시기를 이 "프레스코"에 담아 자신을 표현했다. 배경 왼쪽에는 왕의 화가로서, 그리고 오른쪽에는 펠리페 4세 가족의 핵심으로서 왕의 침실 시종으로, 마지막으로 뒤쪽 중앙에는 계단에 자리 잡고 있는 왕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측근으로서 수행했던 최고 직책인 궁전의 아포센타도르(궁정 행정관)으로 자신을 표현했다.[70][71]
시녀들은 벨라스케스 작품의 주제들의 정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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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들》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재현의 관습과 함께 놀았던 벨라스케스의 초기 작품들과 관련이 있다. 그의 유일한 나체화인 《로크비 비너스》에서, 주인공의 얼굴은 거울에 비쳐져 어떤 사실주의도 넘어설 만큼 흐릿하게 보인다. 거울의 각도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더욱 당혹스럽게도 관객를 바라보고 있다"[72] 1618년 초기 작품인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의 그리스도》에서,[j] 그리스도와 그의 일행은 뒤쪽 방으로 통하는 창을 통해서만 보인다. 내셔널 갤러리는 이것이 원래의 의도라고 명확히 밝힌다. 하지만, 복원 전에는 많은 미술사학자들이 이 장면을 메인 장면의 벽에 걸린 그림이거나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간주했으며, 이 논쟁은 계속되어 왔다.[k][l] 두 장면에서 입은 옷도 다르다. 메인 장면은 당대의 의상을 입고 있는 반면, 그리스도가 등장하는 장면은 전통적인 도상학적 성경 의상을 입고 있다.[l]
시녀들이 그려진 이듬해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실 잣는 여인들》에도 오비디우스의 두 가지 다른 장면이 그려져 있다. 하나는 전경에 당대의 의상을 입은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첫 번째 방 뒤쪽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 앞에서 펼쳐지는 고대 의상을 입은 모습이다. 비평가 시라 담베에 따르면, "이 그림에서는 재현과 권력의 측면이 《시녀들》의 처리 방식과 밀접하게 연결된 방식으로 다루어진다."[8] 1630년대 후반과 1640년대의 일련의 초상화들—모두 현재 프라도 미술관에 있음—에서 벨라스케스는 광대와 다른 왕실 구성원들을 신, 영웅, 철학자로 포즈를 취하게 했다. 적어도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 의도가 분명 희극적이었겠지만, 매우 모호한 방식으로 묘사되었다.[75]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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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2년, 조르다노는 펠리페 4세의 개인 아파트에 있는 그림들을 볼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고, 《시녀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조르다노는 이 작품을 "회화의 신학"이라고 묘사하며,[46] 《벨라스케스에 대한 오마주》를 그리게 되었다.[77] 18세기 초 벨라스케스의 작품은 국제적인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18세기 후반에는 영국 수집가들이 스페인으로 건너가 그의 작품을 수집했다. 당시 영국 감정가들 사이에서 이탈리아의 미술 인기가 절정에 달했기 때문에, 그들은 명백히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은 그림에 집중했고, 《시녀들》과 같은 다른 작품들은 대체로 무시했다.[78]

거의 즉각적인 영향은 델 마소가 《시녀들》에 묘사된 주인공을 그린 두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데, 이들은 어떤 면에서 그 그림의 모티프를 뒤집는다. 10년 후인 1666년, 마조는 당시 15세로 신성 로마 황제와 결혼하기 위해 마드리드를 떠나려던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의 초상화》를 그렸다. 배경에는 뒷쪽의 두 문 안에 인물들이 있는데, 그 중 한 명은 새로운 왕 카를로스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오빠)였고, 다른 한 명은 난쟁이 마리바르볼라였다. 마조의 《과부 마리아나 왕비 초상화》에서는 다시 어린 왕이 알카사르의 문을 통해 마리바르볼라를 포함한 소인증 환자들과 시종들에게 음료를 제공받는 모습을 보여준다.[79][80] 마조의 《예술가 가족》 그림 또한 《시녀들》과 유사한 구도를 보여준다.[81]
프란시스코 고야는 1778년에 《시녀들》의 에칭 판화를 제작했으며,[83]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자신의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의 모델로 삼았다. 《시녀들》에서처럼, 고야 작품의 왕실 가족은 화가의 스튜디오를 방문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또한 두 그림 모두 화가가 캔버스에 작업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캔버스의 뒷면만 보인다. 그러나 고야는 시녀들의 분위기 있고 따뜻한 원근법을 피에르 가시에가 "긴박한 질식감"이라고 부르는 감각으로 대체한다. 고야의 왕실 가족은 "대중을 향한 무대"에 서있고, "화가는 무대 뒤 그림자 속에서 험악한 미소를 지으며 '저들을 보고 직접 판단하시오!'라고 말한다."[76]
19세기 영국 미술품 수집가 윌리엄 존 뱅크스는 반도 전쟁 (1808~1814) 동안 스페인을 여행하며 마조가 그린 《시녀들》 모작을 구입했는데,[84] 그는 이를 벨라스케스의 원본 유화 스케치 습작으로 믿었다. (물론 벨라스케스는 일반적으로 스케치를 그리지 않았다.) 뱅크스는 자신의 구입품을 "내 컬렉션의 영광"이라고 묘사하며, "오랫동안 협상 끝에 높은 가격을 지불해야 했다"고 언급했다.[85]
벨라스케스의 이탈리아적이지 않은 그림들에 대한 평가는, 1819년 페르난도 7세가 왕실 컬렉션을 대중에게 공개한 후에 발전했다.[84] 1879년에 존 싱어 사전트는 《시녀들》의 소규모 모작을 그렸으며, 그의 1882년 그림 《에드워드 달레이 보이트의 딸들》은 벨라스케스의 작품에 대한 오마주이다. 아일랜드 예술가 존 래버리 경은 벨라스케스의 걸작을 자신의 초상화 《버킹엄 궁전의 왕실 가족》(1913)의 기초로 삼았다. 조지 5세는 그림 제작 중에 래버리의 스튜디오를 방문했으며, 아마도 펠리페 4세가 벨라스케스 인물에 산티아고 기사단의 십자가를 덧칠했다는 전설을 기억하며 래버리에게 자신의 손으로 초상화에 기여할 수 있는지 물었다. 래버리에 따르면, "로얄 블루가 적절한 색상이라고 생각하여 팔레트에 섞었고, 그(조지 5세)는 붓을 들어 가터 훈장 리본을 칠했다."[84]
1957년 8월부터 12월까지 파블로 피카소는 시녀들과 그 속의 인물들에 대한 58점의 재해석 작품들을 그렸고, 이 작품들은 현재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미술관에 있는 "시녀들" 방을 채우고 있다.[86] 피카소는 시리즈 내에서 인물들을 변경하지 않았지만, 장면을 자연스럽게 재구성했다. 박물관에 따르면, 그의 작품들은 "형태, 리듬, 색상, 움직임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구성한다.[82]
같이 보기
[편집]-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작품 목록
- 100 Great Paintings, 1980년 BBC 시리즈
내용주
[편집]- ↑ 1855년, 윌리엄 스털링은 "벨라스케스와 그의 작품들"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벨라스케스는 다게르의 발견을 예견하고, 실제 방과 우연히 모인 실제 사람들을 마치 마법으로 영원히 캔버스에 고정시킨 것처럼 표현한 것 같다."[1]
-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는 1646년에 발타사르 카를로스와 약혼했다.[10]
- ↑ 잘려나간 날짜나 이유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로페스-레이는 오른쪽의 잘려나간 부분이 더 두드러진다고 말한다.[17]
- 1 2 3 1735년 기록에 따르면 화재로부터 그림을 구조하는 동안 원래의 액자가 소실되었다. 1747–48년 감정서에는 그림이 "최근에 복원되었다"는 언급이 있다.[18]
- ↑ 이 작품은 스페인 내전 마지막 몇 달 동안 공화국 정부에 의해 프라도 컬렉션의 많은 부분과 함께 제네바로 옮겨졌고, 1939년 스페인 회화 전시회에 걸렸다.[23]
- ↑ 마리아 테레사는 당시 루이 14세의 아내로서 프랑스 왕비였다. 펠리페 프로스페로 아스투리아스 공은 이듬해 태어났으나 네 살에 사망했고, 얼마 후 동생 카를로스 2세가 태어났다. 이 결혼에서 한 딸과 펠리페의 첫 결혼에서 다섯 딸이 유아기에 사망했다.
- ↑ "그리고 왕과 왕비께서 매우 친절하게 받아들이신 특별한 자질을 가진 라임 사냥개 한 쌍."[29]
- ↑ 오른쪽 벽과 천장이 만나는 선을 연장하면 알 수 있다
- ↑ "구성은 공주가 서 있는 지점에서 교차하는 두 개의 강한 대각선에 의해 고정되어 있다..."[50]
- ↑ 로페스-레이에 따르면,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은 벨라스케스의 구도와 거의 공통점이 없으며, 가장 가깝고 의미 있는 선례는 그의 작품 중 거의 40년 전에 세비야에서 그린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의 그리스도》에서 찾을 수 있다. 그가 마드리드에서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를 보기 전이었다."[73]
- ↑ 복원은 1964년에 이루어졌으며, 이전의 "서투른 재도색"을 제거했다.[74]
- 1 2 예를 들어, 조너선 밀러는 1998년에 삽입된 그림을 여전히 거울에 비친 반영으로 간주했다.[72]
각주
[편집]- ↑ López-Rey (1999), p. 211
- ↑ Kubler (1966), pp. 212–214
- 1 2 Kahr (1975), p. 22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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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 Dambe (2006), pp. 229–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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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 3 López-Rey (1999), p. 214
- ↑ López-Rey (1999), p. 306
- ↑ López-Rey (1999), pp. 306, 310
- 1 2 3 López-Rey (1999), pp. 3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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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편집]- 일리노이 시카고 대학교 전자 시각화 연구실의 시녀들 보관됨 5 12월 2008 - 웨이백 머신
- 벨라스케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전시 카탈로그로 시녀들에 대한 자료를 포함한다 (색인 참조).